나의 이야기

라오스 봉사활동 후기

초장화 2018. 11. 14. 11:35

지난 해에 이어 올해도 한국어과 해외봉사활동에 합류했다.
내가 올해도 해외봉사활동에 합류하는 이유는 혹시 라오스에서도 나 같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는지 찾아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올해는 한국교육문화진흥원팀과 함께 해서 16명이 함께 하였다.



  라오스는 워낙 환경이 열악하기로 소문나서 이동 중 교통편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이용한 전용버스는 우리나라 인천공항버스 수준으로 대단히 고급차였다. 내가 지금까지 해외여행 중에 현지에서 타 본 버스 중에서는 최고급이었다. 차를 탄 순간 교육문화진흥원의 박천오 단장님께서 우리들의 안전을 위해 많이 신경을 쓰셨음을 알 수 있었다. 가장 열악한 나라에서 가장 좋은 차로 투어를 하게 되다니 이건 또 무슨 행운인가? 덕분에 비엔티엔과 방비엔, 그리고 공항으로의 이동 중에는 나의 해외 여행 기억 중에서 최고로 쾌적하고 편안한 여정이었다.
첫날은 밤 10시에 비엔티엔 왓따이 공항에 도착하여 흥앙짤런 호텔에서 1박 후 이튿날 비엔티엔 문화탐방으로 6000여 불상이 모셔진 왓시사켓 사원과 부처님 가슴사리를 모셨다는 탈루앙 사원을 둘러봤다. 그리고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는 빠뚜사이 문 꼭대기에 올라가서 비엔티엔 시가지를 조망하고 방비엔으로 이동했다.
방비엔에서는 롱낙쿤 호텔에서 3일 동안 묵었다.
셋째 날, 우리는 드디어 공식봉사일정으로 ‘비엔카이’ 마을 초등학교로 갔다. 세 팀 중 나는 유치반을 맡아 풍선 아트와 종이접기로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떡볶이 만들 시간이 되어 복도의 간이 주방에서 야채썰기를 맡아했다.

누가 무엇을 할 것인지 미리 정하지도 않았지만 요리팀장으로 발탁되신 최윤정 학우님의 지휘 하에 떡볶이 요리도 차근차근 진행되었고, 완성품 맛도 한국에서 먹는 맛과 다를 게 없는 훌륭한 떡볶이 잔치를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의외로 맛나게 먹어줬고, 교장선생님과 그 학교 선생님들도 거부감 없이 떡볶이를 먹어주어서 처음 시도해 본 떢볶이 잔치는 무사히 마무리 되었다.
그 다음으로 마을 어르신 주관 하에 치러진 환영의식행사에 참여했다.

현지의 기복신앙의식인 것 같았다. 현지 과일과 바나나 잎에 싸서 찐 떡, 대나무 통에 넣어 찐 밥, 삶은 통닭 두 마리에 빨강 노랑의 색실이 늘어져 있는 테이블 둘레에 우리들이 둘러앉았다. 그 중심에는 마을의 제사장 쯤 되어보이는 남자 어르신이 의식을 주도하였고 마을의 다른 어르신들은 우리들 뒤에 앉아서 우리나라의 판소리에서 추임새와 비슷한 소리들을 넣으면서 흥을 북돋워 주기도 했다. 의식이 끝나자 중앙 재단에 연결된  색실을 잘라서 손목에 묶어주었다. 복을 빌어주는 뜻이 있다고 했다.
넷째 날은 ‘칸 매잌’ 마을 초등학교로 갔다. 전날과 비슷한 내용으로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좀 큰 편이어서 ‘빵 사세요’노래와 율동을 시도해봤더니 아이들이 의외로 흥겨워하고 잘 따라했다.

우리들의 일정을 마치고 교실을 나오려는데 현지 선생님 두 분이  다가와서 합장하며 ‘~람 라이’라고 말했다. 즐거웠다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표시인 것으로 해석하고 나도 합장으로 ‘컵짜이’로 응답하고 나왔다.
닷새 째 되는 날, 우리는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몽족’ 마을을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대표님의 계획과는 다르게 지난 이틀 동안 갔던 학교과 같은 롬족 마을의 또 다른 학교에 가게 되었다.

현지인 가이드들이 몽족 마을은 접근을 싫어해서 당초에 몽족학교는 섭외  조차도 못했다고 한다. 몽족은 1974년 현재의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에 미국의 반공 전선 구축에 적극 협조했던 부족으로 인류역사상 자기네 전통을 고수한 민족 중 유태인 다음으로 꼽히는 정체성이 강한 민족이라고 한다. 워낙 민족의식이 강해서 라오스의 현 정부가 햇볕정책으로 내놓은 라오스어 교육에도 호응을 하지 않고 가난하더라도 자기네의 몽족 문화와 전통을 고수하려고 라오스 정부의 햇볕정책을 거부하면서 몽족 고유의 언어로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현재의 라오스 공산당 정권이전인 1975년 이전에는 프랑스의 도움을 받으며 왕을 중심으로 지배층으로 군림했던 왕족이었는데 베트남 전 때 미국에 협조한 죄로 미국이 전선에서 물러감과 동시에 수많은 몽족 지도자들은 해외로 도피해서 아직도 유랑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유는 현 공산정권에서 그들에 대한 숙청 작업이 아직도 진행 중이기 때문이란다. 현재 라오스 에는 전체 인구의 10% 정도 만이 깊은 산 속에서 은둔자처럼 살고 있다고 한다. 현 공산정권의 주도 세력인 롬족들도 몽족과는 접촉 자체를 싫어하고 각종 경제활동에서도 배척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우리처럼 몽고 반점도 있고 생활 풍습도 비슷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후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2-3년 전만해도 몽족학교 방문이 더 쉬웠는데 우리나라의 기독교 단체들이 봉사활동한답시고 들어가서 선교활동을 시도하는 바람에 현재의 지배계층인 롬족들이 몽족마을 방문을 싫어하고 안내조차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와 같은 겨레일지도 모르는 몽족들이 대도시 진출도 못하고 원시인처럼 숲속에서 닫힌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는 현실이 가슴아팠다.
못 가본 몽족 마을을 다음 기회에는 꼭 가 볼 수 있기를 고대하며 세 번째 학교인 ‘폼 그넨’ 마을 초등학교로 갔다. 여기서는 떡볶이 잔치만 제외하고 다른 행사는 이전 학교와 동일하게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길에 지난 주에 1차 팀이 다녀간 오지 학교의 낙후된 시설 현황을 살펴보았다. 나는 50년대 생으로 6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이렇게 낙후된 시설에서는 공부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보면 라오스의 현재 교육현장 시설들은 우리나라의 6.25전쟁 직후의 수준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비엔티엔으로 나오는 길에 소금마을에 들러서 남은 독도필동을 모여드는 마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우리는 봉사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세종사이버한국어과에서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진행된 해외봉사활동이었지만 올해는 현지 초등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독도가 한국땅인 것도 알리고 우리의 음식문화와 놀이를 조금이라도 체험하게 해 준 것 같아서 작년보다 훨씬 더 프로그램이 좋았던 것 같다.
다만 내가 한국어 교사 과정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한국어에 대한 프로그램도 더 알차게 준비해 갔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 번째 학교의 벽에 붙어있는 영어 알파벳을 보고 이나라 초등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는가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현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외국인들이 와서 영어 ‘알파벳’으로 환경정리를 해주고 간 것이라고 했다. 아직 초등학교에서 외국어까지 가르치지는 않는다고 했다. 다음에는 우리도 한글 자모를 알릴 수 있는 닿소리 홀소리 체계표를 만들어 가지고 가서 붙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참석한 해외봉사활동이었다. 습도가 높을 때마다 도지는 귓병과 발병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병원 진료를 받아야 하는 내가 정착하여 살기에는 베트남이나 라오스라는 나라의 기후는 너무 습한 것 같다.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가 자연환경이 정말 좋은 나라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폭염이나 열대야가 길어봐야 한 달 정도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골고루 맛볼 수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우리나라가 땅은 좁은데 인구밀도가 높은 것은 이유가 있다. 그 만큼 살기 좋은 자연환경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음에 감사하며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