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역사의 도시 서안 탐방기

초장화 2018. 11. 14. 11:14

   중국 서안은 2015년 여름학기에 ‘지구촌 문화의 이해와 테마여행’이라는 과목을 공부하면서 매력을 느끼고 언젠가는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곳이다. 그 후로 ‘정글만리’라는 책을 읽으면서 중국의 현실과 생활은 물론 역사와 문화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언제라도 동행할 친구가 있고 기회만 된다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때마침 세종사이버대학교에서 해외문화탐방프로그램으로 그 목적지가 중국의 서안이라는 것이다. 세사대 학우들과 동행하는 탐방이라면 더욱 알찬 프로그램일 것 같아서 꼭 참여하고 싶었는데 다행이 탐방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서안의 여러 곳을 다녀왔지만 내게 인상 깊었던 곳인 섬서역사박물관과 병마용갱,장안 성벽을 중심으로 느낀 점을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서안은 세계 4대 고대도시 중의 하나이며 중국 역사의 중심지이고 ‘정글만리’의 배경이 되기도 하는 곳이다. 특히 ‘정글만리’에서 주재원으로 중국에 파견 근무 증이던 김현곤이 중국의 현재를 상징한다는 수도 베이징에서 과거의 도시 서안으로 좌천되어 매연 때문에 고생을 각오하고 입성한다. 이제 개발이 시작되는 서안이라는 도시는 역사적으로는 기원 전부터 형성된 유서 깊은 곳이지만 대륙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어서 바다가 멀기 때문에 문류 유통상 접근성이 좋지 않아서 베이징이나 상하이 만큼 일찍 개발의 바람이 일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 지역 주민들은 등소평 이후 개혁개방시기에도 중앙정부로부터 많이 소외되어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1974년 병마용갱이 발견되고부터 중앙정부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지금은 현 중국의 국가 주석인 시진핑의 고향이기도 한 서안은 개발이 지나치게 급속도로 진척되는 바람에 평상시에도 눈이 아플 정도로 미세먼지가 자욱하여 파란 하늘은 좀처럼 기대할 수 없는 지독한 곳이라고 ‘정글만리’에서도 누차 언급되었다. 요번 여행을 위한 사전 오리엔테이션에서도 인솔자께서 황사 마스크는 필수로 준비해 가야한다고 했었다. 다행이 우리가 도착하기 전날 비가 내려서 생각보다 시야가 많이 흐리지는 않았다. 여행 날 수 만큼 준비해 간 황사 마스크는 한 번도 착용하지 않고 여행을 마쳤으니 우리 일행은 참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현지 가이드는 말했다. 일정 내내 날씨도 좋아서 탈없이 탐방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런 악 조건에도 불구하고 서안에 좌천된 주재원 김현곤이 위안으로 삼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가는 곳곳마다 유물과 유적이 지천으로 깔려져 있어서 그것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때문에 나는 중국의 어는 곳보다도 서안은 꼭 가봐야 할 곳으로 맘먹고 있던 터였다.
첫날 서안에 도착 한 후에 우리는 섬서역사박물관에 갔다.
서안은 역대 17개 왕조, 1200여 년 동안의 수도였던 곳으로 72개나 되는 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을 비롯하여 기원전부터 만들어진 수천년 동안의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특히 서안에서는 6500년 전부터 이미 사람들이 토기를 만들어 쓴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그 오랜 옛날에 그런 진귀한 물건들이 너무나도 솜씨 좋게 만들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중국이란 나라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글만리’에서 김현곤이 맨처음으로 이 역사박물관을 돌아보다가 봐도 봐도 끝이 없는 서안의 보물들은 하루이틀에는 볼 수 없겠다고 판단하고 두고두고 조금씩조금씩 쫀득쫀득 맛있는 것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 맛을 음미하듯이 아껴가며 봐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고 박물관을 나왔다는 소설 속의 구절이 절절하게 공감이 갔다.  섬서역사박물관 외에도 서안에는 서너 개의 박물관이 더 있다고 했다. 섬서역사박물관을 돌아본 나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느낀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유물들이 거의 식민지에서 쟁탈해 온 것들이어서 빼앗긴 나라의 입장을 생각하며 씁쓸한 맘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섬서역사박물관에서는 중국 사람들이 대국이라고 큰 소리 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엄청난 보물들이 다 자기네 조상들의 발자취라니 이런 역사를 갖고 있는 후손으로서의 자존심은 정말 대단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내 마음에 찡한 전류가 느껴진 곳은 병마용갱이다.




이곳은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그 이후로 세상에 많이 알려져서 역사의 도시로 세계인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발굴 된 것은 전체 규모의 1/420 밖에 안 되고 진시황의 지하궁전이 다 발굴되려면 수 백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했다. 진시황이 이 병마용갱을 왜 만들었을까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왕이 사망하면 부하들과 함께 생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생매장하는 대신 실물 모양을 빚은 모형으로 대신해줘서 민심을 얻고 모형제작을 위해 지방의 토후들을 번갈아가며 성안으로 불러들여서 반란 도모를 못하게 하는 등 통치수단의 하나였다고 하였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병마용갱에서 발굴되었다는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는 7200개의 청동 부속품을 조립하여 만들어 졌다고 한다. 부속품들의 정교함이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실물과 똑같았고, 산업사회 이후에 공장에서 제조된 볼트나 너트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때 이미 중국에서는 기원전부터 철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병사가 신고 있는 신발은 그 당시에도 고무를 자유자재로 다루어서 오늘날 우리가 즐겨신는 엠보싱 고무신발을 만들어 신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워낙 그 모양이 정교하고 바닥무늬가 요즘 신발과 비슷해서 전시된 그 조형물 자체가 가짜가 아닌가 의심이 되었다.



  워낙 짝퉁으로 유명한 나라라서 혹시 문화재까지 짝퉁으로 만들어 전시했으랴 싶지만 이것들이 진품이라면 역사는 대대적으로 재조명되고 다시 쓰여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들을 보면 과학이라는 것은 산업 시대 이후의 전유물이 아니고 이미 기원전에도 과학문명이 꽃을 피웠으나 후세에 전수되지 못하고 맥이 끊어졌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을 현지 가이드는 강조하여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정교한 과학적 기술들이 전해 내려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문자도 있었는데······? 한국어학을 공부하는 나는 그 이유를, 문자가 너무 어려워서 기록은 했지만 외부적인 어떤 대 혼란을 겪은 후, 후손들이 제대로 해독을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 때 당시 뜻글자가 아닌 한글이나 로마자 같은 소리글자가 중국에서 사용되었다면 유럽이 아닌 중국에서 이미 2000여 년전에 산업혁명같은 것이 일어났을 것 같은데…….
  그러나 병마용갱을 둘러보는 내내 문화 유산에 대한 부러움도 컸지만 그 시대에 이 현장에서 이런 조형물을 직접 만드는 사람들의 힘겹게 일하는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저 수많은 병사와 말과 청동전차 등을 제작하여 땅 속에 묻어 줘서 후손들은 지금 관광 수입 만으로도 풍요를 누릴 수 있어 좋겠지만 당시의 백성들은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았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왔다.
갱 안에 서있는 수 천 명의 병사들의 얼굴 모습은 하나도 같은 얼굴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각각의 모델은 실제 인물을 몇 날 며칠 씩 세워두고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많은 노동력이 이렇게 헛되이 쓰였으니 백성들은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겠는가?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업적 외에도 문자 통일, 도량형 통일, 만리장성 축조 등 역사적으로 큰 업적을 많이 남겼지만 백성들의 고귀한 노동력을 백성의 삶의 질 향상 보다는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고, 사후를 위한 아방궁 짓기에 더 몰두하였기에 천하를 통일한지 20년도 못 채우고 진나라는 멸망할 수 밖에 없었겠구나 싶었다.
  나흘 째 되는 날 오전, 장안 성벽 자전거 투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정글만리’에서 김현곤 부장도 시간이 없어서 자전거 투어는 뒤로 미루었던 것을 나는 완주했다. 이곳은 명나라 때 건축한 4차선 도로 너비의 14키로의 성벽이다. 명나라 당시에 군사들의 이동 통로로 이용하기 위하여 성벽 위의 도로 폭이 이렇게 넓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지은 50km2의 지하궁전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지만 요즘처럼 중장비도 없던 그 옛날에 이렇게 넓고 높은 성벽을 쌓으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일일이 돌과 흙을 사람들이 직접 나르고 쌓고 했을 텐데 그 당시의 작업 현장 풍경을 상상하다보니 당시의 인부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이 떠올라서 또 마음이 아프다.
이 도로는 500여전 명나라 당시에 돌을 정으로 다듬어서 만든 돌벽돌을 깔아서 만든 도로라서 울퉁불퉁하여 자전거로 속도를 내기는 힘들었다. 천천히 주변을 구경하며 돌았더니 자전거 반납 예정시간인 두 시간이 거의 다 소요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동서남북에 있는 4대문을 통해서 성안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성 안은 오래된 건축물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문화유산 보존 차원에서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나 기대했던 것보다는 고풍스런 유물 유적이 많이 보이지는 않아서 다소 실망스러웠다. 성 밖은 현대식 신축 건물들이 우뚝우뚝 솟아오르는 모습으로 성 안과는 대조되는 풍경이었다. 제발 성벽의 안 쪽 만이라도 더 이상 고층 빌딩을 신축하지 말고 명나라 당시의 모습으로 더 많이 복원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장안 성벽을 내려왔다.
오후에는 권용주 교수님께서 점심식사를 했던 식당에서 짬을 내어 특강을 해주셨다. 그 동안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서안 역사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바로잡아주셨다.  막장 드라마 같은 진시황의 출생의 비밀도 오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만리장성의 축조도 진시황 때 시작한 것이 아니고 진나라 이전부터 여러 작은 나라들이 흉노족의 침략을 막으려고 쌓던 성벽들을 진시황이 천하 통일 후에 그것들은 대대적으로 연결하기 위하여 공사를 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 공사는 한나라 때도 계속되었으며 명나라 때까지 개축공사가 이어졌으므로 만리장성은 진시황만의 업적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결국 진시황의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분노하게 되고 진승과 오광에 의한 최초의 농민봉기 이후 반란이 많아져서 그 중심에 유방과 항우가 등장하고, 항우가 함양(서안)을 먼저 점령하고 병마용갱을 마구잡이로 파괴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처참함은 병마용갱 안에 타다 만 나무기둥과 목이 잘린 체 서 있는 병사들의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천하통일 후 15년 째 되던 해,  진시황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진나라는 바로 멸망한 줄 알았는데 시황제 사망 후에 환관 조고의 유서 조작으로 호해왕자를 왕위에 앉혔으나 항우가 먼저 함양을 정복하게 되자 작전 상 후퇴했던 유방이 팽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결국은 유방이 함양에 입성하게 되었고, 진나라는 천하통일 18년 만에 완전히 사라지고 한나라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권 교수님께서 여정 중간중간에 학우들의 질문에 답변도 해주셨지만 마지막으로 특강을 해주시니 그동안 뒤죽박죽이던 서안의 고대사에 대한 개념이 조금은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권 교수님께서는 서안을 탐방하는 동안에 당나라에 와서 벼슬까지 했다는 신라의 10대 소년 최치원을 생각하며 서안 거리를 걸으셨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민가의 고부와 회족거리, 서문원거리를 걸으면서 지금으로부터 1000여년 전 당나라로 유학와서 외롭게 공부하며 이 거리를 누볐을 신라 소년 최치원! 당나라에서는 벼슬까지 했지만 고국인 신라에 돌아와서는 신분제도 때문에 권력에는 접근도 못하고 가야산에 입산하였다는 신라소년 최치원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곳이 남의 나라 같지 않고 내 나라의 어느 지방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고 미래의 흔적이므로 역사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도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권 교수님의 마무리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서안을 여행하면서 진귀한 문화유적에 감탄했지만 기죽지는 않았다. 우리는 외적으로 보기에 화려한 문화유산은 적지만 ‘훈민정음’이라는 세계 최고의 문자를 창조해 낸 조상이 있지 않은가? 초등학생 때 역사를 처음 배울 때, 고려 왕조를 무너드리고 조선을 세운 것은 정권욕에 불타는 권위주의와 파괴성의 극치가 연상되어 태조 이성계를 미워하고 충신 정몽주를 생각하며 ‘단심가’를 애창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한국어학을 공부하면서부터 한글의 창제 원리와 그 과학성에 탄복하면서 손자 중에서 ‘세종’이라는 성군이 계시어 세상에서 가장 쉽고 아름다운 ‘한글’을 만들어 주신 것은 우리민족에게 하늘이 주신 축복 중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의 역성 혁명이 없었다면 ‘세종’도 ‘훈민정음’도 우리에게 없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니 탐욕으로만 생각했던 이성계의 정권욕조차도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었다.
  우리는 거대한 토목공사로 만들어진 외적으로 화려한 유물 유적이 없는 것에 기죽지 말아야 한다. 우리 역사에 ‘세종대왕’과 같은 훌륭한 군주가 계셨기에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가장 배우기 쉽고 아름다운 ‘한글’이라는 유산이 있지 않은가? 훌륭한 통치자는 외적으로 보이는 토목공사보다는 내실을 기해왔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준다.
세상의 모든 문자는 저절로 생겨나서 차근차근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우리 ‘한글’은 불쌍한 백성들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유사 이래 세계 언어학자들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글자로 인정해서 유네스코에서 해마다 국제문맹퇴치운동에 공헌한 단체나 개인에게 주는 상 이름이 ‘세종대왕 상’이다. 우리는 이 훌륭한 ‘한글’을 만드신 세종의 후손이므로 자부심을 갖고 어느 외국인을 만나도 우리 문화유산1호로 ‘훈민정음’을 자랑해도 될 것이다.
  서안탐방은 끝났지만 우리는 ‘서우림’으로 재회를 약속했다. 여행 내내 버스에서 늙은이 싫다고 도망가지 않고 짝궁으로 끝까지 함께 해준 영상취재기자 새벽님, 프로 가수 뺨치는 실력으로 모든 누나들을 감동시킨 제일님, 그 외 멋지고 훌륭하신 여러분들과 서안탐방을 함께 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서우림’을 통해 이 좋은 만남이 앞으로도 계속된다고 하니 다음 만남도 기대된다.
요즘에 한류 바람 따라 외국인들의 한국어 학습에 대한 열기도 크게 느껴진다. 서안은 중국의 찬란한 과거가 있는 곳이다. 나는 한국어교사로서 앞으로 만나게 될 중국인 한국어학습자들에게 요번에 탐방한 서안의 찬란한 역사이야기로 더 살갑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